프놈펜이 함락되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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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킬링필드'의 한 장면.

크메르루즈 함락 46주년 기념

지난 4월 17일은 공산군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함락한 지 46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킬링필드로 일컬어지는 인구 2백만 대학살, 죽음의 시대 서막이 열린 바로 그 날이기도 하다.

시계 초침을 돌려 1973년 8월로 가보자.

1973년 8월 미국정부는 캄보디아 대 군사원조를 중단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1970년부터 시작된 일명 ‘메뉴작전’으로 비밀리 진행된 미 공군의 대 크메르루즈게릴라군에 대한 공습 역시 중단된 것이다.

1975년 4월 12일 미국 성조기를 든채 프놈펜을 철수, 태국 공군기지에 도착한 존 건터 딘 주캄보디아미국대사의 모습.

미군이 13년간 치러진 베트남전쟁에서 발을 뺄 기미를 보이자, 크메르루주군의 기세는 더욱 더 올랐다. 사기충천한 크메르루즈군은 부정부패에 무능하기까지 한 론놀 정부군을 상대로 파상공세를 펼쳤고, 수도 프놈펜을 뺀 대부분 지역을 그들의 해방구로 만들어버렸다.

이로 인해 수도 프놈펜은 고립무원에 빠져들고 말았다. 전쟁 전 인구 60만명 남짓한 수도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들로 인해 2~300만명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전기와 쌀은 턱없이 부족했고, 이틀마다 2시간씩만 겨우 전기가 공급되었다. 외부세계와 연결된 주요도로는 이미 크메르루즈가 장악한 상태였다. 남베트남에서 메콩강을 통해 들어오던 보급로 역시 장악당하는 바람에 보급로가 끊겼다. 이로 인해 물가는 하루가 멀게 폭등해버렸다. 메콩강 상류에선 죽은 시체들이 떠내려 왔다. 흙탕물은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가고 도시는 전염병마저 돌았다.

캄보디아 국토를 관통하는 거대 강 메콩을 적의 수중에 빼앗긴 것은 론놀 정부 입장에서는 가슴을 치게 할 만큼 통탄스런 일이었다. 수도로 들어오는 물자보급의 90% 가량은 메콩강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1975년 4월 17일 아침 수도 프놈펜 시내로 들어오고 있는 어린 크메르루즈 병사들의 모습 @AFP

미국의 군사지원마저 끊기자, 론놀 정부는 다른 우방국들을 찾아다니며 원조를 요청했다. 론놀 정부는 우리나라 정부에도 사절단을 보내 군 파병을 요청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파병의사할 생각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 포드 행정부로부터 주한미군 감축 압박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파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실익은 없었다.

30년 만에 공개된 외교비밀문서에도 당시 우리대사관 모 참사관이 본국 외교부 상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군의 캄보디아 파병이 실익이 없음을 지적하고 반대의사를 밝히는 내용이 나온다.

프놈펜 외곽에선 크메르루즈군이 쏜 로켓탄들이 시내 한복판에 수시로 떨어졌다. 민간인들이 뜬금없이 날아든 로켓탄 포격에 목숨을 잃어갔다. 일부 시민들은 크메르루즈군의 포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콘크리트 담벼락을 따라 걸어 다녔고, 시내 중심가는 암시장에서 구입한 미군 철모와 방탄조끼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패망을 앞둔 1년 전 부터 프놈펜 정부는 이미 패배감에 젖어든 상태였다. 이때부터 일부 대사관들은 철수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974년 호주, 이스라엘, 싱가폴 대사관이 철수를 단행했다. 우리나라 대사관도 철수에 대비한 준비에 들어갔다. 거주 교민들의 인원을 파악하고 현지 정치상황을 수시로 본국에 보고했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즈 공산군에 의해 함락된 프놈펜 도시의 모습. 투항한 정부군인들이 민간인들과 함께 트럭에 탄채 모니봉 대로를 활보하고 있다. @Roland Neveu

기밀 해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1974년 7월 당시 우리 대사관이 파악한 교민수는 대략 4~50명 내외였다. 미군소속으로 파견 근무중인 한국인 근로자들과 일부 거주 민간인, 김세원 대사를 포함한 대사관 직원과 중정부 파견 참사관, 무관 1명 등이 전부였다.

프놈펜을 포위한 크메르루즈군의 파상 공격은 그해 1년 내내 계속 이어졌다. 론놀 정부가 곧 무너지고 론놀이 국외로 탈출 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하지만, 미군의 군수물자 지원 덕분에 정부군은 반격에 나설 수 있었고, 1974년 그해 연말 간신히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크메르루즈는 결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듬해인 1975년 1월 초 사건이 하나 터졌다. 우리나라 국적의 한승호 소속 유조선 2척이 수도 프놈펜에 연료를 제공하기 위해 메콩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쁘레이웽주 네악르앙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서 크메르루즈군에 의해 포격을 당한 것이다.

이중 1대는 침몰하고 나머지 1대는 반파된 가운데 미군의 예인선에 의해 간신히 사이공으로 돌려보내졌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우리 대사관은 이 사건을 계기로 대사관 철수계획을 보다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미국 대사관 철수와 함께 미 해군헬기로 프놈펜을 탈출하고 있는 시민들. @AP photo

3월이 되자 전세가 확실히 크메르루즈쪽으로 기울었다. 일부 정부군 군인은 크메르루즈쪽에 항복하거나 전향해버렸다. 중국에 수립한 망명정부를 이끌어온 시하누크 국왕은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그는 론놀정부가 협상 제안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국왕은 협상에 나설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이미 전세는 크메르루즈 쪽으로 완전히 기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국왕은 론놀 정부에 시간을 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자신을 배신한 론놀 대통령을 비롯해 사촌형 시릭마탁 왕자, 롱 보렛 총리 등 7인을 처형대상으로 공개 발표했다.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투항하라는 삐라가 밤새 수천, 수 만장씩 시내에 뿌려졌다.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로켓포가 포첸통국제공항 활주로에 날아들었고, 론놀 정부에게는 마지막 생명선이나 다름없던 공항이 결국 크메르루즈군의 수하에 넘어가고 말았다.

미국의 군사지원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된 론놀 정부는 4월 1일 망명을 결정했다. 미군이 제공한 공군기로 인도네이시아를 거쳐 하와이로 떠났다.

우리대사관도 철수를 결정했다. 남아 있는 교민들에게도 국외로 탈출할 것을 권했다. 이제 남은 자유진영 대사관은 미국과 자유중국(대만), 일본 대사관뿐이었다. 우리 대사관은 본국에 4월 10일 철수를 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크메르루즈의 프놈펜 진격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척되자, 안전을 담보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결국 철수 계획을 더 앞당겼다. 4월 3일 대사관 직원 1진을 태국으로 먼저 철수시킨 뒤 김세원 대사는 무전통신원과 함께 대사관을 빠져나와 미국대사관이 제공한 헬기로 철수했다. 미군회사 소속 한국인들도 탈출에 성공했으며, 우리 대사관이 철수한 4월 5일, 일본과 자유중국 대사관도 함께 철수를 단행했다. 이후 김세원 대사는 본부 훈령에 따라 본국의 지시가 있기 까지 대기했다.

프놈펜이 함락된 직후 불안에 떨고 있는 프놈펜 시민들 @Roland Neveu

우리 대사관 철수 6일후인 4월 11일 미국 ABC 방송국 소속 종군사진기자인 이요섭 기자도 미국대사관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다음날 12일 마지막 남아있던 미국대사관마저 철수했다. 미국대사관을 출발한 수 대의 검은색 차량들은 탈출용 미군헬기들이 대기 중이던 올림픽 스타디움 경기장으로 향했다. 당시 미국대사 존 건터 딘이 대사관에 걸었던 성조기를 가슴에 품은 체 헬기를 탔다. (※ 당시 그 사진은 미국이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치러진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진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프놈펜 철수에 앞두고 미국 존 건터 딘 대사는 시하누크 국왕이 지목한 7명의 처형 대상자 명단에 오른 론놀정부 핵심고위 관료들에게 망명 탈출을 제안했다. 그러나 롱 보렛 전 총리를 비롯한 상당수 고위관료들은 미국의 이 같은 제안을 단호 거절했다. 국가의 존망과 안위의 책임진 이 나라 정치인들이 가진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대사가 망명을 권유한 대상에는 전 시락마탁 왕자도 있었다. 그는 시하누크 국왕과는 사촌지간이지만, 가장 큰 정적이기도 했다.

투항한 정부군이 바닥에 내던진 총과 무기 등을 앞에 두고 환호하는 시민들과 크메르루즈군인들의 모습.

미국 대사가 친서를 통해 그의 망명을 돕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마지막 답장을 통해 시락마딱 왕자는 미국정부의 호의를 거절하며 미국이 자신들을 배신한 사실에 대해 분노를 표했다. 이후 시락 마딱 왕자는 크메르루군에 붙들여 왓프놈 근처 스포츠 클럽 수영장에서 총살당했다. 같은 날 롱 보렛 총리와 론놀 총리의 동생 론논 역시 같은 장소에서 처형을 당했다. 당시 국무부 장관인 헨리 키신저가 의회에서 시릭 마딱 왕자가 직접 쓴 편지를 낭독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한편, 방콕에 머물던 대사관 직원들은 모든 교민들이 안전하게 철수했다고 외교본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항공기술자 김대국씨가 아직 프놈펜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고, 미국정부측으로부터 뒤늦게 제보를 받은 외교부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김세원 대사로부터 이 같은 보도를 받은 외교부는 국내 언론에 일체 보도되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대국씨는 크메르루즈군에 잡혔지만, 운좋게 외국인 피신처로 쓰이던 프랑스대사관에 보내져 5월 10일 외국인 1차 추방자 600명 명단에 포함되어 트럭에 실려 무사히 태국 국경으로 넘어 올 수 있었다.

프놈펜 함락 직전 마지막 남은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국외로 탈출중인 캄보디아 시민들@FRANCOISE DEMULDERROGER VIOLLET AFP

4월 14일 론놀 정부군의 마지막 항전이 시작되었다. 남은 2천여명 군인들이 프놈펜 마지막 전선을 지키며 끝까지 저항했다. 하지만, 크메르루즈군인들은 동서남북 전방위로 동시에 프놈펜을 향해 돌진했다.

함락되기 하루 전 날인 4월 16일은 하루 종일 마치 태풍의 전야처럼 고요하고 정적마저 흘렀다. 간간히 총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탈출기회를 얻지 못한 외국인들과 캄보디아 공무원 및 가족들이 마지막 피신처가 된 프랑스대사관으로 피했다. 프랑스대사관은 처음에는 국적에 상관없이 난민들을 받아들였지만, 반나절도 되지 않아 국적과 신분 확인을 통해 대사관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의 수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 대사관의 2미터 남짓한 철문은 사람들의 생과 사를 결정짓는 운명의 문이었다. 이 철문은 당시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현재까지도 프랑스 대사관 내에 전시 보관중이며, 이를 소재로 한 영화도 제작된 바 있다.

프랑스대사관 철문을 사이에 두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캄보디아 여성의 모습.

크메르루즈군은 단파 라디오 선전을 통해 보복이나 자국민들을 상대한 유혈사태는 없을 것이라고 선전했다. 시민들은 반신반의했다. 탈출의 기회를 이미 놓친 사람들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아무도 예측을 못했다. 일부 정부군 군인들은 백기를 만들어 크메르루즈 환영식을 준비했다. 보복살해의 두려움속에 오로지 살기 위한 마지막 안간힘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불안에 떨던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어느새 새벽이 밝아왔다.

4월 17일 아침 7시 붉은 머플러와 검은 색 파자마 옷을 입은 군인들이 5번 국도를 따라 모니봉대로 북단에서 걸어 내려왔다. 정규군 군인과 달리 이들의 규율은 엄격해 보이지 않았고 허술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들의 복장은 물론이 걸음거리조차 제각각이었다. 중학생 남짓 소년병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군화 대신 타이어로 만든 슬리퍼에 검은 파자마를 입은 채 활보하는 군인들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호기심속에 지켜보는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일부 시민들은 적대적이지 않은 크메르루즈 군인들의 표정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프놈펜이 함락된 직후 불안에 떨고 있는 프놈펜 시민들 @Roland Neveu

론놀의 정부군 군인들은 백기를 들고 나와 웃음으로 이들을 맞이했고, 일부 시민들과 철모르는 어린 아이들은 모니봉 대로변에 나와 이들을 박수를 치며 반겼다. 일부 투항한 정부군인들은 미군 장갑차에 크메르루즈군과 시민들을 태우고 시내를 활보하기까지 했다. 일부 크메르루즈 군인들은 중공제 AK소총을 하늘을 향해 쏘며 승리를 자축했다.

자국 대사관 철수에도 불구하고, 이 광경을 지켜본 이들이 있었다. 역사적인 현장을 직접 보고 취재하기 위해 남아있던 외국인 종군기자들이었다.

프놈펜 함락후에도 남았던 뉴욕타임즈 시드니쉔버그 기자(가운데)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킬링필드〉에도 나오는 〈뉴욕타임즈〉 소속 시드니 쉔버그 기자와 영국 출신 종군기자 존 스와인(River of Time의 저자), 그리고 전설적인 종군기자로 알려진 알 로카프 같은 인물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 기자들은 프놈펜 함락 소식을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본국에 타전했다.

그러나, 프랑스기자 마르크 필록스, 교토통신의 코키 이시야마 기자 등 일부 외신기자들은 운이 나쁘게도 당시 크메르루즈군을 취재하다고 실종 뒤 살해되고 말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취재에 나섰던 기자들은 크메르루즈 정권의 살해 협박에 결국 프랑스대사관으로 피신해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철수한 김대국씨와 같은 트럭에 실려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가야 했다.

방콕에 대기 중이던 주캄보디아대사관 김세원 대사는 태국정부가 공식발표한 내용을 인용해, 외교본부에 수도 프놈펜이 공산군에 의해 함락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급히 보고했다.

“1975년 4월 17일 프놈펜 함락”

[박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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