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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1월 3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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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A은행이 한국계 은행?

  • 캄보디아에서 가라오케 술집까지 운영했던 비운의 황태자, 어느 재벌그룹 회장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

현지 진출 외국계 은행들 가운데 가장 잘 나가는 은행은 단연 ABA은행일 것이다. 짙은 군청색의 은행 지점 외관이 인상적인 이 은행의 ATM은 시내 어디서든 눈에 띈다. 특히, 모바일 앱 기능이 편리하고 직관적이어서 현지인 고객들도 다수 확보한 은행이다. 현지인들과 금융거래를 하다보면, 대부분 ABA은행 계좌를 알려준다. 그 만큼 현지화에 성공한 은행으로 볼 수 있다. 이 은행은 현재 캐나다 금융기업인 ‘National​ Bank​ of​ Canada’가 100% 지분을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은행이 과거 한때 한국인 소유의 은행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최소 10년 이상 산 교민들이라면 혹시 기억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교민들은 이 은행이 한국계였다고 말하면 다들 놀라는 눈치다.

이 은행은 원래 진로소주로 유명한 진로그룹 장진호 전 회장이 지난 1996년 설립한 현지 은행이었다. 당시 진로그룹 일부 직원들이 이 은행에 파견 근무를 나가기도 했다. 자본금은 1백30억원 규모로 알려져 있다. 이 은행은 현지인 차명(借名)으로 운영했기에 진로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도 채권단 관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장 전 회장이 자금세탁을 위한 목적으로 몰래 세운 은행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럼에도 현지인들 사이에선 오랫동안 ‘한국의 은행’으로 통했다. 이 은행 지점장들도 대부분 한국에서 스카웃 되어 온 금융전문가들이었다. 참고로, 일부 지점장들은 지금까지도 캄보디아에 남아 현지 금융권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장 전 회장은 손이 꽤 큰 CEO였다. 그는 36살이던 1988년 진로그룹 총수가 됐다. 이후 주력 업종을 소주에서 의료기기, 자원개발, 멀티미디어, 건설로 사업을 확대했다. 1990년대 중반 사업을 확대하면서 그는 ‘오지(奧地) 경영론’을 폈다. 리스크가 크더라도 성장 잠재력이 큰 나라에서 대박을 내겠다는 전략인데, 그 첫 번째 타깃이 바로 캄보디아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캄보디아 최고 실력자 훈센 총리와 친분관계를 쌓았다. 이후 총리의 장녀 훈 마나가 그의 사업을 봐주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2년에는 훈 마나의 도움을 받아 캄보디아 국적까지 취득했다. 이름도 ‘찬 삼락’(Chan Samrach)으로 바꿨다. 새 이름은 훈센 총리의 젊은 시절 쓰던 이름이었다. 당시 장 전회장과 훈 마나의 밀월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후 지난 2005년에는 훈 마나로부터 ABA은행 지분 51%도 넘겨받으면서 최대주주가 됐다.

국내언론 <시사저널>이 확보한 ABA은행의 2005년 11월 29일자 이사회 의사록에 따르면, 훈 마나는 2005년 11월 1일자로 대표이사직을 사임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때 훈 마나는 자신이 보유한 지분 50%를 장 전 회장의 이중 국적 이름인 찬삼락에게 이전했다. 이와 함께 기존 주주(50%)인 김 아무개씨도 찬삼락에게 1%의 지분을 넘겼다. 일련의 조치로 장 전 회장이 지분 51%를 확보하면서, ABA은행의 최대 주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지난 2013년 월간조선과 단독 인터뷰 당시의 모습. @월간조선

당시 장 전 회장은 훈센측이 한국의 투자를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고문 역할도 했다. 진로는 캄보디아에 농장을 개발하고 캄보디아는 진로에 철도·항만·관광업 투자를 요청했다고 한다.

진로그룹이 발표한 잠정 합의내용에 따르면 농장 규모는 2억~3억평이었다. 서울의 면적은 604㎢로 1억8300만평 정도인 만큼, 규모가 너무 커 실제로도 진행되지 못했다.

한때 재계 19위까지 올랐던 장진호의 진로는…
장 전 회장은 1988년 36세의 나이로 제2대 회장에 취임해 사세 확장을 이끌었다. 진로는 희석식 ‘두꺼비 소주’로 1970년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며, 소주시장 1위를 내달렸다. 진로그룹은 1996년 3조5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재계 서열 19위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유통·건설·제약·식품·맥주 등 분야를 가리지 않은 사세확장이 장 회장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1997년 IMF 구제금융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후 2003년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후 장진호 회장은 5496억원을 사기대출 받고 비자금 7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5년형을 받고 풀려난 그는 2005년 2월 가족을 데리고 캄보디아로 출국했다. 그 직후 다른 비자금 건으로 검찰의 수배를 받았다. 장 전 회장은 이후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백억 원 상당의 세금이 체납된 상태여서 한국에 들어올 수도 없었다.

장 전 회장은 도피한 이전부터도 캄보디아에서 여러 사업을 벌였다. 그가 측근을 내세워 운영했던 캄보디아 사업체 중에서 현지인들에게 가장 유명했던 것은 술집이었다. 이름은 ‘더 블루 KTV‘ 였다.

‘더 블루’는 프놈펜의 올림픽경기장 근처에 있었다. 5층 건물 전체를 쓰는 이 술집은 당시 꽤나 유명했다. 주 고객은 프놈펜 교민들이었다. 교민들 사이에선 통상 ‘블루 가라오께’로 불렸다. 일각에선 장 전 회장이 누군가를 접대할 때 이곳을 이용한다는 말도 있었다. 자본금은 약 100만 달러였다. 일부 측근들은 내부적으로 우리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냐며 푸념했다고 한다. 술집은 장 전 회장의 측근이었던 강 아무개씨 명의로 운영했다. 국내 유명 인사들이 캄보디아를 방문할 때에 이 술집에서 접대했다. 하지만, 장 전 회장이 지난 2006년 말 캄보디아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차명 대표로 있던 강씨가 갑자기 이 술집의 소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장 전 회장은 또 다른 측근인 송 아무개씨 명의로 소유권을 이전하고 현지에서 법정 다툼을 벌였다. 이 일로 장 전 회장이 화가 많이 나서 반란을 일으킨 강씨 이름으로 된 재산을 모조리 다른 사람 명의로 돌려놓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장 전 회장은 ‘더 블루’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업을 측근들의 차명으로 설립했다. 역시나 이 과정에서도 소유권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믿었던 측근들이 배신을 하고 장 전 회장에게 소유권을 요구한 것이다. 국내에서 운영 중인 코리막스 역시 장 전 회장과 소유권 분쟁을 벌였다. 이 회사는 국내 유명 백화점 대부분에 매장이 입점해 있을 정도로 알짜배기 회사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2007년 장진호 전 회장이 회사 대표인 정낙찬씨를 상대로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전체 주식 중 47.5%(19만주)에 대해서는 장 전 회장의 소유를 인정했다. 장 전 회장은 그 외에도 2013년 차명으로 맡겨놓은 4000억원어치의 채권을 되찾기 위해 측근인 오 아무개씨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하기도 했다. 오씨는 진로그룹 재무담당 임원 출신으로 캄보디아 ABA은행 등 장 전 회장의 차명 회사 경영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었다.

‘찬 삼락’이란 이름으로 만든 장진호 전 회장의 캄보디아 여권과 중국비자 사본.@시사저널

장 전 회장은 술집뿐만 아니라 부동산개발회사도 운영했다. 지난 2005년 부동산 개발업체 KC&M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찬삼락이란 이름이 1인 주주로 등재되어 있었다. 장 전 회장은 2006년 7월, 평소 친분을 가진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을 캄보디아로 불러들였다. 연면적 10만㎡(3만250평) 규모의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립하는 ‘1500 프로젝트’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웅열 회장은 당시 코오롱건설의 하노이 사무소장과 본사 간부를 캄보디아로 급파했다. 이 회장 역시 장 전 회장과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캄보디아로 건너갔다. 하지만 부지 매입이 실패로 끝나면서 그가 추진한 부동산개발사업은 빛을 보지 못했다.

장 전 회장은 그 외에도 금융 브로커로 알려진 김재록씨 등과 함께 소주 사업인 ‘55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설립 콘셉트는 순수 국내 자본으로 만든 가칭 ‘정통 우리 소주 회사’였다. 초기 자금은 1500억원 정도였다. 소주회사를 설립해 한국에 상장한다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참고로 김재록씨는 지난 2006년 정·재계를 뒤흔들었던 ‘김재록 게이트’의 주인공이었다. 김씨가 연루되었거나, 의혹이 제기된 사건만 해도 현대차 양재동 사옥 증축 인·허가 비리, 외환은행 헐값 매각, 대한생명 매각 등 여럿이 있다. 김씨는 방대한 정·재계 인맥을 통해 각종 인·허가 비리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김씨의 인맥 고리는 장진호 전 회장도 피해가지 못했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할 때 장 전 회장은 진로의 법정 관리 이후에도 여전히 소주회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 전 회장은 세금 미납액과 각종 금융 기관의 체납액, 벌금 등 수백억원이 넘는 빚이 있어 국내로 돌아가지 못할 처지임에도 장 전 회장이 아무 제약 없이 현지에서 사업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총리의 딸 훈 마나의 비호 덕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가운데 장 전 회장은 지난 2008년 ABA은행을 전격 매각했다. 그러나 장 전 회장은 이 은행을 카자흐스탄 바이저캐피털(Visor Capital)그룹에 넘기는 과정에서 탈세를 했다. 단 한푼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중국으로 도피행각을 벌였다. 일종의 ‘먹튀’ 전략을 쓴 셈이다. 그 바람에 10년 가까이 그의 뒤를 봐준 훈 마나의 입장까지 난감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를 도왔던 캄보디아정부 고위관리들 역시 장 전 회장에게 심한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을 게 분명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장 전 회장이 캄보디아조차 돌아가기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후 장 전 회장은 중국에 머물며 또 다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다. 북경에서는 중국인 사장을 앞세워 게임 업체 이다양광에 투자, 운영했고, 이번에도 측근인 이 아무개씨를 통해 TV 프로덕션인 N사까지 설립했다. 장 전 회장의 둘째 부인인 이 아무개씨와 해외 담당 변호사 고 아무개씨를 등기이사로 등재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제작해 중국 방송사에 납품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얼마 후 대표가 이씨에서 신씨로 바뀌고, 방송사와의 계약마저 깨지면서 현재는 유명무실한 회사로 전락했다.

장 전 회장은 2009년 130억원을 들여 중국에 I사를 설립했다. 이 역시 차명으로 운영하는 회사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출신 연구원을 대표로 영입했다. LG전자 휘센 냉장고의 핵심 기술을 개발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인사가 중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국정원과 검찰에 적발됐다. 검찰은 기술 유출 배후에 장 전 회장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했다. 거액을 투자한 사업을 시작도 못하고 접으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마음고생을 하면서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이 운영하던 ‘더 블루 룸살롱형 가라오케’. (올림픽스타디움 인근 소재). 그 동안 소유권과 상호명이 여러 번 바뀐 가운데 코로나19로 인해 현재 영업을 일시 중단한 상태다. @구글지도 사진

장진호 전 회장은 해외 도피 중에도 이처럼 차명 회사를 통해 활발한 경영 활동을 벌여왔다. 한 측근에 따르면 현재 알려진 것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한다. 조세 회피 지역인 버진아일랜드뿐 아니라 스위스, 미국 메릴린치에서도 현재 장 전 회장의 자금 흐름이 여러 차례 감지되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방법이 은밀한 탓에 검찰이나 국세청 차원에서 수사에 나서지 않는다면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란 추정이다.

장 전 회장은 지난 2013년 스스로 요청한 〈월간조선〉 기자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1984년부터 10여년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500억~600억원 가량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밝혀, 그의 폭로 이유와 관련해 세간의 의혹과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1984년 무렵 전두환 정권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향후 정치활동을 막기 위해 진로그룹의 자금을 김 전 대통령에게 제공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장 전 회장은 중국에서 게임업체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업에 차명 투자를 하고 현지인 법인을 통해 회사를 운영하다가 2015년 4월 중국 베이징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결국 숨졌다. 재기를 꿈꾸며 해외에서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지만, 외국에서의 오랜 유랑 생활 끝에 쓸쓸히 생을 마감한 셈이다.

고려대 재학시절 학교 대표를 맡아 고려대 바둑의 전성시대를 이끈 바 있는 장 전 회장은 아마 5단 실력의 바둑 고수로 유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무리한 확장이란 ‘패착’에 신음하다 승기를 잡지 못한 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향년 63세, 사업가로서 아직은 죽기 아까운 나이였다.

그해 4월7일 서울 아산병원에 빈소가 마련됐다. 한때 재계를 호령했던 그룹의 총수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빈소는 소박했다고 전해진다.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는 말이 있지만 장 전 회장에게 만큼은 예외라는 말이 적용된 셈이다.

외환위기 이후 그룹이 공중 분해되면서 10년간 캄보디아와 중국에서 도피생활을 해온 장 전 회장은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숨을 거둔 ‘비운의 황태자’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기자는 ABA은행 앞을 지날 때 마다 문득문득 장 전 회장의 이름 석자와 진로 브랜드가 떠오르곤 한다.

[박정연 기자]


두꺼비 진로와 진로그룹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

진로그룹은 1924년 10월 3일 장학엽 회장이 평안남도 용강군에 설립한 ‘진천양조상회’에서 시작됐다. 진천양조상회의 원래 심벌은 ‘원숭이’였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원숭이가 복을 상징하는 영특한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원숭이 좌우로는 쌀이 있어서, 쌀로 빚은 복주를 마시면 복을 누리며 장수한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장 창업주는 한국전쟁 와중인 1950년 12월 월남하여, 1년 뒤 부산 동화양조, 1952년에는 부산 구포양조를 설립했다. 1954년, 장 창업주는 고향과 부산에서의 사업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서광주조를 차렸다. 원숭이가 ‘두꺼비’로 바뀐 때가 이때다. 그동안 원숭이를 마스코트로 삼았던 진로는 ‘교활하고 음흉한’ 원숭이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두꺼비로 마스코트를 변경했다. ‘두꺼비 진로’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순간이었다.

장학엽 회장은 이어 피혁 회사인 서광산업을 최초의 계열사로 두고 1961년 10월 진로그룹의 회장이 된다. 5년 후인 1966년 서광주조는 진로주조, 1975년에 (주)진로로 상호를 바꾸게 된다.

두꺼비 진로가 출시 때부터 1등은 아니었다. 당시는 전남 목포에 기반을 둔삼학소주가 전국 시장을 잡고 있었다. 한때 65%가 넘는 전국시장점유율을 보이기도 했던 삼학소주가 진로에게 위협받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진로가 생산방식을 증류식에서 희석식으로 전환하면서부터다. 가격은 당연히 희석식 소주가 더 쌌다. 진로는 가격 경쟁력에 마케팅·광고활동 강화 등으로 삼학의 독무대였던 소주시장을 무서운 속도로 파고 들어갔다. 여기에 1971년 삼학소주의 납세증지 위조사건이 발표되면서 진로는 날개를 달았다. 삼학소주를 취급하던 대리점은 등을 돌렸고 매출은 감소했다. 마침내 1970년 12월 진로는 소주 시장 1위를 차지하면서 한국의 대표 주류회사로 자리를 잡았다.

과거 소주는 지역주(酒)와 전국주로 나뉘어 있었다. 지역별로 대구·경북의 금복주, 전라도 보해·보배소주, 강원도 경월, 충청도 선양 등이 대표적인 지역주였다. 이들은 지역 내에서만 판매가 가능했고 다른 지역으로의 진출은 불가한 상태였다. 당시 진로는 전국주였다. 최대 소주시장인 서울 지역의 판매권을 잡은 진로는 전국에 소주를 납품할 수 있었다.

장학엽 회장은 1975년 73세의 나이에 경영에서 손을 떼고, 조카인 장익용에게 경영을 맡겼다. 당시 장 회장의 아들 장진호는 1952년생으로 서울고 졸업 후 고려대 경영학과 재학 중인 23세 대학생으로 거대한 회사를 경영하기에는 벅찬 나이였다. 사실 이때부터 장학엽 일가의 경영권 분쟁은 예고되기 시작했다. 장진호는 아버지가 사망하기 직전인 1984년 11월부터 이복형인 장봉용과 함께 장익용에게 경영권을 넘겨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장진호는 절치부심 끝에 장익용 몰래 주식을 매입하고, 우호지분을 모아 마침내 1985년 10월 경영권을 가져왔다.

3년 후인 1988년 장진호는 진로그룹의 회장에 올랐다. 배신을 한 사촌형 장익용은 피혁회사인 (주)서광, 이복형 장봉용은 진로발효를 맡으며 가족간 분쟁은 대략 마무리됐다. 1988년 36세의 나이로 진로그룹 회장에 취임한 장진호 회장은 이후 분야를 가리지 않고 사세를 확장했다. 장 전 회장은 대놓고 ‘탈주류’를 선언하기도 했다.

도꺼비 소주로 유명했던 국내 소주의 대명사였던 진로 소주의 브랜드들. @박정연

앞서 1987년 계열사인 진로종합유통를 설립한데 이어, 했으며, 1988년 서초동 본사 인근에 아크리스 백화점을 열었다. 이어 전선, 제약, 식품, 건설, 금융, 방송 등으로 거침없이 그룹의 세를 불려나갔다. 1989년 본사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으로 이전했다. 1992년 (주)진로와 미국의 쿠어스사가 50:50 비율로 합작한 진로쿠어스맥주를 설립했다. 1994년 진로쿠어스맥주는 카스를 출시하며 명맥을 이어나갔다. 진로그룹은 소주(참이슬)와 맥주(카스)를 쌍두마차로 국내 주류 시장을 휘어잡았으며 신용금고, 운송, 유통, 건설 등에도 진출해 계열사를 30여개로 늘리는 등 재벌그룹으로의 면모를 갖추며 1996년 재계 19위까지 올랐다. 그룹 총매출은 1987년 4100억원에서 3조5000억원으로 늘었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은 기업 내 유동성에 리스크를 키웠다. 결국 IMF의 시련을 이기지 못한 채 이 그룹은 1997년 9월 부도를 맞게 된다. 미국 쿠어스사와 합작해 ‘카스’라는 히트상품을 낸 진로쿠어스맥주가 1999년 오비맥주에 매각됐고, 2000년 진로 발렌타인스는 프랑스 페르노리카사에 팔렸다. 그리고 종국에는 2003년 1월 한국증권거래소(현 증권선물거래소)로부터 상장을 폐지 당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두꺼비 소주’로 대표되는 알짜기업 진로소주 역시 2005년 7월 하이트맥주에 인수되면서 한 때 재계 19위의 진로그룹이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장 전 회장 역시 이 과정에서 구속 기소 됐다. 그가 자본잠식 된 계열사에 이사회 승인 없이 자금을 부당지원하고 또 분식회계를 통해 금융기관에서 불법으로 대출받은 혐의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해 장 전 회장은 가족과 함께 캄보디아로 떠났다. 찬 삼락이란 이름의 캄보디아 여권을 든 채…

지난 2015년 4월 고 장진호 회장의 빈소가 마련한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의 모습. @뉴시스
<진로그룹은?>
▲1924년 진천양조상회 설립
▲1954년 서광주조(진로) 설립
▲1970년 소주시장 1위
▲1985년 장학엽 창업주 사망
▲1988년 장진호 회장 취임
▲1980년대 새그린, 연합전선, 진로위스키, 진로종합유통, 진로백화점, 진로제약, 진로건설 인수 및 설립
▲1990년대 초 진로쿠어스맥주, 진로베스토아, 진로종합식품, 진로인터스트리즈, 여성전문 케이블 텔레비전, 진로하이리빙, 진로지리산샘물 등 계열사 확장
▲1997년 부도
▲1998년 화의 인가 결정
▲2003년 4월 이후 법정관리, 계열사 매각 및 청산

※ 이 기사는 〈시사저널〉 기획기사 ‘도망 중인 회장님의 기막힌 변신술’ ‘장진호 전 진로회장의 숨겨둔 4000억은 누구 손에?’와 <월간조선> 실린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의 단독 인터뷰’ 등을 상당부분 참고,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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