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로버트 카파, 이요섭 종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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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베트남전 참전 당시 이요섭 기자.

한국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전쟁보도사진의 개념을 정립한 선구자였던 그의 삶

캄보디아 내전당시 베트콩 포로로 잡혀 구사일생 살아남았으나….

미국 ABC방송 정글의 불사조였다고 애도

사진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 역대 최고의 종군사진작가를 꼽으라면, 단연 ‘로버트 파카’( Robert Capa, 1913~1954)를 든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유태인계 미국 사진기자인 로버트 카파는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쟁터의 최전선에 섰던 종군 기자였다. 일반인들에게는 스페인 내전 때 찍은 <어느 병사의 죽음> 사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사진으로 퓰리처 상을 받았고 종군기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에스파냐전, 세계2차대전, 1차중동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등 무려 다섯 전쟁을 취재했으며, 전쟁의 현실을 사진에 그대로 담고, 사진과 캡션을 통해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서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유명사진들을 남긴 그는 마초기질에 매력인 외모를 가진 남자로 배우 잉글리드 버그만과의 사랑으로도 유명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전장에서 지뢰를 밟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죽은 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로버트 파커를 20세기 가장 위대한 사진작가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러한 위대한 사진기자가 역사상 오로지 그 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그에 필적할만한 훌륭한 사진기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이요섭’ 기자다.

한국 최초의 종군기자로 이름을 날린 이요섭 기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파견되어 목숨을 건 취재 현장에 수도 없이 나섰다. 그와 함께 일하던 외신기자들은 그를 가리켜, 목숨이 9개 달린 기자라는 농담까지 건넬 정도였다. 그는 전장의 생생함을 전하기 위해라면, 어디든 목숨을 걸고 달려간, 진짜 기자였다. 한국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보도사진의 역할을 정립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국민대를 중퇴한 뒤 20대 초반 서울신문사에 입사해 사진부기자로 일하던 그가 한국 최초의 종군기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5년 무렵이었다. 그는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의 전투를 취재하기 위해 베트남에 첫발을 들였다. 마침 친 동생도 청룡부대에 파견된 상태였다.

그는 맹호부대의 1,6호 작전, 청룡부대의 투이호아 작전, 나트랑 작전 등을 직접 현장에서 취재했다. 절대 찍지 말라는 당시 부대장의 경고에도 불구, 그는 자신 찍은 사진들을 모아 본사에 보냈고 그 해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1966년에는 그가 찍은 파월장병의 늘름한 모습을 담은 160점의 사진들이 전국을 순회하며 전시되기도 했다.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서서히 발을 빼기 시작할 무렵인 1970년 초, 한국군도 철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요섭은 여전히 전쟁터에 남아있기를 원했다. 종군기자인 그에게 전쟁터는 삶의 터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그의 활동반경이 워낙 넓었던 터라 그의 명성은 이미 외국통신사들 사이에 입소문이 자자했고, 마침내 영국에 본사를 둔 〈비즈 뉴스〉의 제안을 받고 이적을 결심했다. 곧바로 자신이 소속된 한국일보사에 사표를 써서 보냈다.

그 후 베트남전쟁이 이웃나라인 캄보디아까지 번지자, 전투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캄보디아 국경을 넘었다. 그는 당시 론놀의 정부군을 따라 카메라를 든 채 전국의 전투지역을 누볐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1970년 11월 22일 오전이었다. 그는 수도 프놈펜을 출발, 7번 도로를 따라 정부군 ‘파라슈트’ 부대가 전투를 벌이는 수꾼(Sukun) 지역으로 갔다. 도로선 확보를 위한 베트콩과의 전투였다. 곧바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전세가 기울자 이를 눈치 챈 다른 종군기자들은 이미 달아났고, 결국 진지에 남아있던 그는 정부군 소속 군인 수 명과 함께 베트콩의 포로가 되었다. 저녁 6시 해질 무렵이었다.

그는 어둑해진 저녁 무렵 베트콩들의 아지트가 있는 깊은 정글 속으로 끌려갔고, 곧바로 베트콩 출신 장교의 심문이 이어졌다.

장교는 다른 포로들과 달리 사복을 입은 그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비스 뉴스〉의 ‘카메라맨’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베트콩들은 그를 군인들과는 반대방향으로 끌고 갔다. 그와 함께 포로로 잡힌 캄보디아 여군 4명과 2명의 정부군과 그의 아내 및 1명의 어린이도 7시간 동안 논·밭길을 끌려갔다.

이후 그는 월맹군이 점령하고 있는 한 마을에서 처음으로 밧줄에 두 손을 결박당했다.

곧이어 야음을 이용 한 강행군이 또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이틈을 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그때까지 갖고 있었던 여러 가지 신분증을 찢어버렸다. 다만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텔레비전 뉴스 서비스사인 〈비스 뉴스〉의 신분증만 간직했다.

그는 살기 위해서 홍콩주재언론사 기자라는 신분 외에 자신이 한국인임을 끝까지 숨겼다. 당시 월맹군과 베트콩들에게 척결대상 1호는 미국인, 2호는 한국인, 3호는 캄보디아 정부군이었다.

월맹군 장교가 나타나 수시로 그를 심문했다. 그때마다 월맹군은 한자를 사용했으나, 그는 전혀 모르는 문자라고 시치미를 떼곤 했다.

그는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온갖 수모를 당했다. 카메라 장비와 시계 등 갖고 있던 모든 소지품을 빼앗겼고, 고작 제공된 식사는 쌀죽에 개구리 다리 볶음이 전부였다. 그에게는 감시병 4명이 붙었다. 대소변조차 맘대로 보지 못했다. 그들은 입고 있던 옷도 빼앗고, 베트콩 군복으로 갈아입게 했다. 이후로도 양손이 결박당한 상태로 그는 4번이나 어둠을 틈타 다른 베트콩 마을로 옮겨지곤 했다.

포로로 잡힌 지 12일이 되던 날 이동 중 미공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그는 탈출을 위한 최대 적기로 판단했다. 혼란한 틈을 노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베트콩이 던져 준 검정색 고무 샌달, 일명 ‘호치민 신발’을 신은 채 적진 반대방향으로 무작정 내달렸다. 다행히, 베트콩의 총알은 그의 몸을 운좋게 빗나갔다. 그는 이후 총에 맞지 않기 위해 무려 4Km를 낮은 포복으로 논바닥과 수풀속을 기어갔다. 해가 지자, 캄보디아인들이 사는 허름한 어느 민가에 숨어 들어가 2일간을 지낸 뒤, 약 30km를 걸었다. 새벽 4시 무렵 마침내 그는 수꾼 지역에 주둔한 정부군 54대대 기지에 도착했다.

1970년 12월 7일, 포로로 잡힌 지 14일째 되던 날이었다.

프놈펜 주재 한국대사관에도 그의 생존소식이 알려졌고, 국내신문에도 그의 생환소식이 전해졌다. 이요섭 기자는 이택근 대사의 도움으로 대사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가족들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전장에 남기로 했다.

그 다음해 전장 취재에 나섰다가 적의 공격에 손을 다치기도 했다. 하마터면 사진을 영원히 찍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당시 함께 동고동락하던 여러 외국출신 종군기자들이 목숨을 잃고 사라진 것에 비하면, 그는 운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을 뻔했음에도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취재에 나선 이요섭 기자는 동료 외신기자들 사이에서 취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의 투철한 기자정신에 감복한 나머지, 외국 유명언론사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왔다. 미국의 유명방송사 ‘ABC’도 그 중 한곳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방송사의 컨셉에 맞게 사진 촬영보다 영상 촬영에 보다 비중을 두고 ABC 카메라맨으로 취재에 나서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내전이 한창이었던 때라 그의 주요 활동무대는 당연 캄보디아가 되었다.

당시 수도 프놈펜은 하루에도 수 십 번이 넘게 크메르루즈군이 쏜 로켓탄이 날아드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순식간에 피에 젖은 시신이 되어 도심 한복판에 뒹굴었다.

정부군의 패배가 확실해졌다.

1974년 4월 5일 크메르루즈군의 프놈펜 함락을 불과 12일 앞둔 가운데, 우리대사관도 철수를 단행하고, 동시에 우리 교민들의 철수작전도 마무리했다. 하지만 대사관이 완전철수한 후 에도 이요섭 기자은 현지에 남아 있다가 4월 11일 미국대사관이 제공하는 마지막 해군헬기를 타고 프놈펜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러나 종군기자로서 그의 미션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사이공이 함락되던 그 날, 4월 30일 조국을 잃고 방황하는 사이공 시민들의 모습을 영상에 담아 전 세계에 알렸다. 전쟁의 실상과 참혹한 현실, 그리고 망국의 서러움에 망연자실한 자유 베트남 시민들의 아픔을 담은 이 영상물은 미국 시청자들마저 큰 충격과 함께 슬픔의 눈물을 쏟아내게 했다. 이는 또 한편으로 그의 이름 석 자가 전 미국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목숨이 아홉 개 달린 기자’라는 별명을 얻었음에도 그의 운은 끝까지 좋은 것은 아니었다. 1977년 1월 2일 태국 남부 국경지대에 벌어진 베트콩 소탕 작전 전투를 취재하던 중 그만 지뢰를 밟고 말았다. 함께 취재를 간 태국 동료기자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그는 한쪽 다리를 잃었다. 하지만, 그는 반쯤 떨어져 나간 다리를 부여잡은 채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불굴의 기자정신을 끝까지 발휘한 것이다.

미국 ABC방송사 사장이 급히 방콕으로 날아와 한쪽 다리를 잃은 이요섭 기자를 위로하며, 특수고무인조다리를 선물했다. 이후 그는 당시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전설의 기자로 각인되었고, 여러 상을 받기도 했다. 방콕과 도쿄지국을 거쳐, 한국인 최초로 1979년 ABC TV 한국 지국장으로 임명되어 일했다. 피 비린내 나는 전장 대신 그는 서울 시내를 인조 목발로 걸어 다니며, 외신기자들이 모여 있는 서울 프레스센터 내 13층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국발 기사를 미국에 송고했다. 그 당시에도 사진기자들 사이에서 그는 살아있는 전설로 통했다. 함께 일하는 후배기자들에게는 늘 기자로서의 책임과 기자정신을 가르쳤다.

그러던 1993년 어느 날 그는 암치료 차 미국에 갔다가 그곳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포로로 잡히고 다리를 잘리고도 살아남은 그였지만, 병마와의 싸움에서는 결국 지고 만 것이다.

그의 나이 60세. 아직은 죽기에 이른 나이였다.

1993년 8월 25일 미국의 주요외신들은 미국 ABC TV 서울지국장 이요섭이 미국에서 암으로 사망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국내 매스컴들은 ‘정글의 불사조’였다며 그를 애도했다. 태평양을 건너 그의 사망소식이 국내에도 알려졌다.

이요섭 기자,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어언 2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국내외 소위 내노라 하는 유명 사진기자마저도 그를 한국의 로버트 파커, 아니 한국이 낳은 전설의 사진기자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그는 살아생전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목숨을 걸고 찍은 사진 한 장은 긴 명기사보다 낫다”

[박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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