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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1월 3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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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옛 추억이 되어버린 캄보디아 영화산업의 ‘황금시대’

캄보디아 영화산업에 있어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최고의 황금기였다. 해마다 수십여 편 이상이 자국산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당시 제작된 영화 수만도 300여 편이 넘었다. 영화광으로 유명했던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도 이 나라 영화산업 발전과 부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가 직접 주연을 맡거나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든 영화만도 50여 편이 넘는다. 국왕의 이 같은 전폭적인 지지와 관심 속에 이 나라 영화산업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고 〈12 자매〉 같은 일부 흥행 영화들은 해외에 수출 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 미국의 배후지원을 받은 론놀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국외로 추방시킴에 따라 이 나라 영화산업에도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한해 제작되는 영화 편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들마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70년대 초반까지 일반 관객들의 영화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평일 낮에도 극장은 늘 관객들로 붐볐다. 극장표를 사기 위해 1시간 이상 줄을 서는 경우도 당시엔 흔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은막의 스타들은 당연히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극장표도 그리 비싼 편은 아닌 터라 영화 감상은 일반인들이 즐길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여가활동 중 하나였다.

무려 120편의 영화에 캐스팅되었던 60년대 캄보디아 최고 인기 배우 Kong Sam Oeun.

영화 관객들이 늘어난 것은 도시 인구가 갑자기 늘어난 탓도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개입된 미국의 공습이 캄보디아 영토로까지 확대되고, 내전까지 발생, 전쟁을 피해 수많은 난민이 수도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당시 프놈펜 인구는 난민들을 포함해 무려 400만 명에 육박했다. 지금 인구보다 두 배나 많았던 셈이다.

관객들 가운데 특히 젊은 세대들은 영화를 통해 잠시나마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전쟁에 대한 생각마저 달랐다. 참혹한 전쟁을 이미 경험한 기성세대들은 전쟁이 또 날까 두려워했지만, 젊은 세대들은 당장 현실에서 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과거 6~70년대 우리도 그러했듯이, 영화관은 젊은이들을 위한 일종의 현실 도피처였다.

1973년 후반을 넘어서부터는 자국산 영화들이 스크린에서 거의 사라졌다. 대도시를 뺀 대부분의 시골 마을들을 이미 크메르루즈 게릴라들이 장악, 안전상 지방 로케 촬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대신 미국산 영화들이 스크린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쟁 영화나 존 웨인 주연의 서부영화가 젊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론놀 정권은 멋진 영웅담을 소재로 한 미국산 영화를 통해 자국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불어 넣어주고 싶어 했다. 이 같은 정부의 계산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영화를 본 뒤 실제로 군대를 자원한 청년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 숫자란 당시 정권의 선전과는 큰 괴리가 있었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젊은이들는 극장을 찾았다가 행여 실업자라는 사실이 들통나 정부군 트럭에 실려 군대에 강제 차출되지 않을까 불안에 떨었다. 당시 도시 청년들은 정부군 입대를 극도로 기피했다. 정부군의 부패상과 무능을 그동안 눈으로 많이 보아온 데다, 크메르루즈에게 전쟁에서 질 것이란 일종의 패배의식이 사회 전반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초 프놈펜 시내 한 영화관의 모습. 군인들이 감시의 눈길로 관객들을 지켜보고 있다.

1974년 봄이 되자 론놀 정부가 극장주들에게 영업시간을 대폭 줄이거나, 문을 닫으라고 강요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영화관들이 크메르루즈 게릴라들의 집중적인 테러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대부분의 극장주들는 이에 크게 반발했다. 일부 극장주들은 영화 티켓에 붙는 세금이 전쟁비용을 대는 데 절대 필요하며, 관객 입장 시 보안 관리만 철저히 하면 안전하다는 논리를 폈다. 일부 부패한 공무원들과 군인 경찰들은 이 주장에 솔깃했다. 그동안 각종 세금뿐만 아니라 뒷돈까지 받아 챙겨온 만큼, 자신들의 부수입(?)이 주는 걸 속으로는 원치 않았다. 결국 이 조치는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1974년 가을이 되자,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졌다. 이제는 영화관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관객들이 이제는 전쟁이 코앞에 다가왔다고 판단한 나머지, 더 이상 영화관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부의 경고대로 관객들이 몰리는 시내 일부 영화관에서는 수류탄 투척 사건이 발생하는 등 크메르루즈 게릴라들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각종 사건과 범죄가 연이어 터지기 시작했다. 밤마다 포성이 가까이 들려왔고,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 공격으로 집들이 부서졌다. 메콩강에선 썩은 시체들이 떠내려오기도 했다.

1975년 4월 17일 드디어 공산 게릴라 크메르루주 군이 프놈펜에 진입했다. 정부군은 백기를 들고 투항했고, 대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강제로 시골로 내보내졌다. 관객들이 떠난 빈 영화관들은 유령의 집처럼 폐허로 변했다. 간신히 버티던 영화산업도 흔적 없이 공중 분해되었다. 그 후로는 수년간 크메르루즈 정권에 의해 약간의 영상필름만이 간간히 제작됐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국가 선전 홍보용 영상물이거나 외국 손님을 영접하는 홍보뉴스 영상이 전부였다.

70년대 크메르루즈 시절 목숨을 잃은 캄보디아 인기 배우 Vichara Dany

한편, 이 시기 크메르루즈의 눈에 비친 과거 은막의 스타들과 영화 제작자들은 자본주의에 오염된, 반드시 사라져야 할 사회악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인기스타 Kong Sam Oeun과 Nop Nem, Chea Yuthorn, Som Vansodany, Vichara Dany 등 당대 스크린을 주름잡던, 그야말로 최고의 남녀 스타 배우들이 대부분 처형당하거나 실종됐다. 지난 2014년 제작된 영화 ‘더 라스트 릴’(제88회 아카데미 출품작)에 출연해 올드 영화팬들의 큰 관심을 끈 바 있는 왕년의 스타 ‘Dy Saveth’은 프놈펜 함락 직전 해외로 도피하는 바람에 운 좋게 살아남은 드믄 케이스로 기록된다.

영화 라스트 릴에 출연한 원로배우 Dy Saveth.(왼쪽) 그녀는 킬링필드 시대 운좋게 살아남은 당대 여배우다.

크메르루즈를 몰아내고 베트남이 이 땅을 차지한 1980년대는 미국영화들이 떠난 자리를 옛 소련 영화와 베트남 계몽영화들이 차지해버렸다.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예전만 못했다. 전쟁이 막 끝난 터라 당장은 먹고 살기도 힘든 그런 시절인 탓도 있었다. 잘 나가던 배우들도 대부분 사라지고, 제작자들도, 그 아무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이로 인해 80년대 이 나라 영화산업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완전히 죽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했던 이 나라의 영화산업이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다시 부활의 몸짓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부터다.

[박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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