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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1월 3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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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판 김형욱 실종사건

– 국왕의 총애를 받다 배신의 칼을 겨둔 뒤 사라진 한 정치인의 말로

삼 사리 대사에게 폭행을 당한 뒤 경찰에 신고한 여성 이우 엥 셍과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의 모습. 야당 지도자로 유명한 삼 랭시의 이복동생인 셈이다.

1958년 6월 어느 날 밤 캄보디아 출신 20대 젊은 여성이 황급히 런던의 한 경찰서 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몸은 온통 피멍 자국에 상처투성이였다. 더욱이 그녀는 이제 갓 임신한 산모였다. 그녀는 한 남성으로부터 폭행당했다고 신고했다. 사소한 잘못을 했음에도 목숨을 잃을 만큼 심한 채찍질을 당했다고도 진술했다. 

경찰이 가해자의 이름을 묻자 그녀는 ‘삼 사리’라고 대답했다. 잠시 후 이 남성의 신분을 확인한 수사관들은 화들짝 놀랐다. 가해 남성은 다름 아닌 영국주재 캄보디아 대사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 피해 여성은 조사과정에서 자신을 삼 사리 대사 집에서 일하는 하녀 중 한 명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대사가 영국에 데리고 온 3명의 첩 중 한 명이었다. 

이 사건은 〈데일리 밀러〉 등 현지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삼 사리 대사가 내놓은 해명은 영국 독자들을 다시 한 번 아연 질색케 했다. 

그는 “캄보디아에서 하인이 잘못을 저지르면 주인이 체벌하는 것은 오랜 관습”이라고 답하는 한편, 그러한 관습에 따라 얼굴은 때리지 않고 등과 허벅지만 때렸다는 궁색한 변명까지 늘어놨다. 그는 또 자국 대사관은 영국이 아닌 캄보디아의 영토라는 주권론을 내세우며, 자국 영토 내에서 발생한 사소한 사건이라는 논리와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캄보디아 정부를 발각 뒤집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을 크게 격노케 했다.  

한 때 삼 사리 대사(1917~1962(?))는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다. 국정 전반을 책임지는 주요 핵심인사 가운데 대표주자로서 1954년 제네바회의에 참석, 캄보디아의 분할 독립을 막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국왕의 총애 속에 능력을 인정받아 훗날 부총리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또한 국왕이 주도한 ‘성꿈 리어스 니욤’(대중사회주의공동체) 창당을 돕는 등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다. 하지만 그는 과거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김형욱 중정부장처럼 지나치게 권력을 탐하고 선거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았던 냉혈한이었다. 그는 국왕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악역도 자처했으며, 각종 협박폭행사건에도 가담하거나 연루되었다.

런던에 소재한 주영국캄보디아대사관 외부 전경

껭 완삭이란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1940년대 사법관련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손으로 용의자를 구타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그는 심지어 조직폭력 등 불량배들을 끌어 모아 야당인사나 국왕의 반대세력에 대한 백색테러도 서슴치 않았다.  

그가 요직에서 밀려나 영국 주재 대사로 발령을 받게 된 결정적 계기는 그 전 해에 발생한 캄보디아산 후추 밀수출 사건에 그가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부터다. 게다가 수입 면허권과 관련해 뇌물수수사건까지 터지자, 그는 점차 국왕의 신임을 잃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왕 앞에 나서 무릎을 꿇고 읍소하며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또 머리와 눈썹을 밀고 자숙의 의미로 절에 들어가는 쇼맨십을 펼치며, 국왕의 동정심을 유도하기도 했다. 국왕은  그의 탁월한 능력과 충성심을 높이 산 터라 고심 끝에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 대신 부정부패 사건 수사에서 그를 멀리 떨어져 있게 하고, 또 삼 사리를 시기해온 정치적 반대 세력들의 불만도 어느 정도 잠재울 겸 영국 대사 자격으로 그를 해외에 내보냈다. 

미인대회 우승자 출신인 삼 사리 대사의 첩 이우 엥 셍과 그의 장성한 아들. 1970년대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국왕의 이 같은 속 깊은 배려와 관용에 불구, 결국 그는 하녀 폭행사건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곧바로 본국으로 소환되고 말았다. 그는 대사직을 포함해 모든 공직에서 즉각 해임되고 말았다. 그로서는 더 이상 국왕의 자비나 동정심은 기대할 수 없었다.   

권력에서 완전히 쫓겨난 그는 곧바로 반 시하누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독립 신문사를 만들고 신문 지면 대부분을 국왕의 실정과 정부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비난하는데 할애했다. 심지어 그는 독자적인 정당까지 창당해 또 다시 국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나 결과는 아무런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1959년 초 삼 사리는 우파 정치인 손 녹탄, 그리고 씨엠립 주지사 덥 추온과 함께 시하누크 국왕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일명 ‘방콕 모의’라 불리는 쿠데타 음모 사건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실제로 배후에 태국과 남베트남이 있음이 사실로 드러났다. 당시 미국의 배후설도 나돌았다. 일각에선 삼 사리가 미국 CIA에 협조해 함께 일했다는 의심을 품기도 했다. 그해 1월 시하누크 국왕은 깜뽕짬주에서 가진 한 연설에서 미국정보당국이 자신의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시도했다고 공개했다. 삼 사리를 겨냥한 발언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그는 태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의 망명 생활은 그 후로 베일에 싸였고, 2년여가 지난 1962년 돌연 실종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일했던 미국 CIA 정보요원이나, 또는 그를 몹시 싫어했던 제3의 누군가에 의해 암살되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한편, 삼 사리의 아이를 밴 여성의 이름은 ‘이우 엥 셍’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녀의 원래 이름은 ‘소웅 손 말리’였다. 1958년 7월 21일 발행 미국 〈타임즈〉는 그녀가 1955년 열린 캄보디아 미스선발대회 우승자 중 한명이었다. 

당시 대회를 주관한 삼 사리는 이례적으로 우승자를 두 명 뽑게끔 압력을 넣었다. 심사위원들이 뽑은 ‘까엡 카나리’ 라는 여성과 함께 삼 사리 자신이 마음속으로 미리 점지해 둔 이우 엥 셍이 공동우승자로 선발되었다. 권력과 부에 대한 욕심뿐만 아니라 여성편력마저 강했던 삼 사리는 이후 두 여성 모두를 차례대로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영국 대사로 발령이 나자, 자신의 정실부인과 5명의 자식들, 그리고 두 첩 말고도 새로 맞아들인 첩과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 

삼 사리에 폭행을 당했다고 밝힌 이우 엥 셍은 삼 사리의 첩이 되기 전인 1949년부터 크메르루즈의 최고 지도자였던 폴 포트가 한 때 사귀던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프랑스 유학에서 막 돌아온 가난한 청년인 폴 포트 대신 당시 권력과 부를 가진 삼 사리의 첩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결과만 따져보면 폴 포트는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 집단에게 사랑마저 빼앗겼던 셈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실종된 삼 사리가 망명중인 캄보디아 야당 최고 지도자이자, 훈센 총리의 오랜 정치적 라이벌인 삼 랭시 전 총재의 친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당시 삼 랭시 역시 아버지와 함께 런던에서 살았고, 그는 아버지의 첩들의 얼굴을 생생히 기억했다. 하지만 하녀 폭행사건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9살로 아버지가 일으킨 폭행사건의 내막까지 이해하기에 아직은 어린 나이였다.  

주 영국대사를 지낸 삼 사리의 아들. 삼 랭시 야당총재의 모습.

삼 랭시 전 총재는 훗날 선친의 실종사건과 관련해, 자신의 아버지가 1962년 말 또는 1963년 경 라오스 팍세에서 캄보디아 우파 정치인이자 한때 자신의 아버지와 손을 잡고 태국 음모사건에 가담했던 손 녹 탄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살해동기가 불분명한데다, 관련 증거도 없이 사실상 아들 삼 랭시의 주장은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한편, 삼 사리와의 사이에서 남자 아이를 낳은 이 여성은 사건 발생 직후 영국정부에 망명을 신청했다. 이후 당시 35살 바텐더로 일하던 이집트계 영국인 남성과 결혼식을 올렸고, 또 다시 새 남편과 결별한 뒤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지 여부는 확인된 바 없다. 

이 사건은 유신정권시대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만큼 위세를 떨쳤던 중앙정보부(전 국정원 전신) 김형욱 부장의 실종사건과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그는 온갖 악역을 자처하며 최고 권력에게 충성을 다했음에도 이후 ‘토사구팽’ 당하자, 미국으로 망명, 그 앙갚음으로 박대통령의 각종 부정과 비리를 폭로했다. 그는 1976년 터진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증폭시키며, 미 하원 청문회까지 출석, 박 대통령을 더욱 곤경에 빠지게 하고, 심지어 권력의 치부를 고발하는 회고록 출간까지 추진했다. 그러다 결국 그는 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라진 뒤 이후 실종 처리되고 말았다. 

최고 권력자에 거꾸로 칼을 들이 댄 배신자들의 말로는 늘 이렇게 비참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박정연 기자]

영화광이었던 노로돔 시하누크국왕은 삼 사리 등 이 기획 주도한 방콕 쿠테타 음모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Shadow Over Angkor(1968)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영화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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